요즘 주경석독야덕하며 수면 시간을 대폭 줄였더니 장염에 걸려버렸다.

 (주경석독야덕 :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공부하고(퇴근하고 11시까지) 밤에는 덕질했다(집에 도착해서 새벽까지)는 뜻이다.)

 주경야독만 해도 힘든데, 취미까지 병행하니까 몸이 탈 날 수밖에.

 

 그래도 정말이지 도무지 참을 수 없었다.

 이렇게 무언가에 빠져본 게 너무 오랜만이고 (2013년 겨울왕국에 빠졌던 게 내 마지막 덕질이었다) 

 이제 나이를 먹었으니 무언가에 그렇게 열중하는 일이 오지 않겠지, 하고 생각했는데 

 연예인 그것도 외국 락밴드와 배우들에게 이렇게 빠지다니.

 내 안에 아직 이런 열정이 남아있었다니 스스로 놀라는 중이다. 


 그리고 정말 다행히도 우리나라에서 보헤미안 랩소디가 메가 히트를 해주어서 얘기를 나눌 사람도 정말 많다. 그 점도 무척 기쁘다. 

 누군가가 너무 좋다는 걸 끊임없이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정말이지 큰 힘이 된다.

 곧 MBC에서 라이브에이드 재방송도 해주고, 퀸 관련 다큐멘터리도 만들어준다고 한다. 

 변변찮은 솜씨로 관련 기사나 인터뷰 번역해서 올리면 기뻐해주는 다른 팬들이 많다. 이것 역시 취미 생활을 열심히 해나갈 원동력이 된다. 

 

 

 돌이켜 보면 난 항상 이랬다.

 관심이 없는 것에는 정말 관심이 없고, 대신 한번 빠지기 시작하면 미친듯이 파고든다.

 예를 들어, 한참 윤하에 빠졌을 때는 다른 노래는 하나도 듣지 않고 윤하의 1집부터 최근 곡까지 모두 받아서 한 달 내내 듣고는 했었고

 영화에 빠졌을 때는 그 영화를 각각 다른 포맷과 관에서 최소 세 번은 봤다. 

 요시모토 바나나에 빠졌을 땐 요시모토 바나나의 처녀작인 키친부터 모든 시리즈를 섭렵하기도 했다. 


 일상 생활이 내가 사랑하는 대상으로 뒤범벅이 되고, 세상 만사 다른 일들은 무척 하찮게 느껴진다. 

 다만 이번에는 시험이 목전에 있으니 가급적 공부와 취미를 병행하려고 노력하고 있기는 하다. (그 결과 병에 걸려버렸다.)

 

 이렇게 무언가에 빠져드는 성향은, 아마 같은 덕후가 아니면 이해하지 못하지 않을까?

 누군가를 좋아해서 많은 돈을 쓰고, 시간을 들인다고 그 사람에게 그 마음이 전해지는 것도 아닌데

 다 큰 어른이 미련한 짓을 한다고 한심한 시선으로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무엇을 깊히 사랑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이 뜨겁게 벅차오르는 감정, 무언가에 내 모든 것을 던지는 심정, 사소한 글귀 하나 사진 한 장 만으로도 울고 웃을 수 있는 트랜스 상태.

 실제 연애보다도 (어떤 의미에서는) 순수하고 엄청 큰 내적 충만감을 준다. 

 보헤미안 랩소디의 'I sometimes I wish I'd never been born at all(가끔은 아예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생각해요)' 가사에 100퍼센트 공감하는 나인데도 취미 생활을 할 때 만큼은 태어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는 멈출 수 없다. 설령 그게 나의 수면을 앗아가도. 

 무언가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삶이 너무 지루하다.

 고마워요 퀸. 그리고 보헤미안 랩소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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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석독야덕  (0) 2018.12.01



 '해리포터 존'을 꼭 들려야 한다며 오사카 유니버셜 스튜디오를 다녀오고, 

 재미가 더럽게 없기로 유명한 '호그와트 미스터리' 게임을 팬심으로 버텨나가고,

 해리포터 소설 및 영화를 몇 번이나 정주행했던 포터헤드에게 2년만에 찾아온 단비 같은 영화, <신비한 동물들과 그린델왈드의 범죄>.

 당연히 개봉 첫 날 퇴근하자마자 보러갔고, 기대에 잔뜩 차서 고르고 고른 짤로 포토티켓까지 뽑았다.


 

<이 때가 그래도 행복했다...>


 물론 영화 보러 가기 전부터 약간 불안하기는 했다. 

 네이버 영화에 비해 비교적 믿을 만하다고 느끼는 로튼 토마토 점수가 형편 없었고, 메타 크리틱 역시 영화에 대해 박한 평가를 주었으니.

 그래서 기대를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찌되었건 해리포터 시리즈에 매력적인 장면들과 캐릭터들이 나오니 팬심으로 덮을 수 있는 수준은 되지 않을까 막연한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이런 마음은 <신비한 동물들과 그린델왈드의 범죄> (이하 신동범)을 보며 산산조각 나버렸다.

 신비한 동물들은 여전히 사랑스러웠고, 뉴트나 덤블도어도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파리의 화려한 마법세계나 마법을 사용한 거대 스케일의 전투씬, 추억의 호그와트 등은 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다만 그 외의 나머지 부분은 이게 정말 '돈을 치덕치덕 바른 블록버스터 영화가 맞나' 싶을 정도로 형편이 없었으니 문제다.






 1. 수 많은 신 캐릭터, 산만한 플롯


 원작인 해리포터 시리즈 자체가 동시에 많은 캐릭터들이 나오고, 그들 사이의 관계가 복잡한 작품이었다.

 덤블도어, 스네이프, 맥고나걸을 비롯한 교수진에 네 기숙사의 학생들, 그들의 가족, 마법부 사람들, 어둠을 먹는 자들. 

 20권이 넘는 방대한 분량 덕분에 그들의 뒤얽힌 관계성과 안타까운 사정이 나름 잘 설명될 수 있었고, 

 설정 덕후인 조앤 롤링 여사는 그것만으로도 부족해서 포터헤드나 인터뷰를 통해 각 개인 별로 존재하는 수 많은 숨은 설정들을 풀어주었다.

 그때마다 책을 달달 외우는 팬덤은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며 받아들였고 말이다.


 안타깝게도 조앤 롤링은 신동범에 나오는 캐릭터들에게도 같은 레벨의 복잡한 설정을 부여하고자 했다.

 아래 그림은 영화를 보고 나와 정리한 등장인물 사이의 관계도이다.


 


 그나마 1편 신동사는 뉴트와 제이콥, 티나와 퀴니, 그리고 크레덴스라는 제한된 인물들에 집중하여

 그들이 어떤 성격이고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그렇기에 보는 관객들도 그들에 감정 이입하거나 매력을 느끼고, 2시간이라는 (별 내용도 없었던) 시간을 집중할 수 있었다.


 반면 신동범은 여기에 테세우스, 레타, 코르버스, 유서프, 그린델왈드, 덤블도어, 내기니라는 수 많은 신 캐릭터들을 추가하면서

 2시간 내에 그들이 가지고 있는 사연을 다 풀어내려고 어떻게든 발버둥 쳤으나, 이는 오히려 빈약한 서사로 이어졌다.

 너무 많은 부분들이 설명되지 않고 지나갔고, 각 캐릭터들의 심정이 제대로 묘사되지 않으니

 누가 죽더라도 '아 쟤가 죽네', 누가 배신하더라도 '배신할 거 같았는데 정말하네' 정도로 덤덤하게 지나가게 만든다.

 

 예를 들어 원작 해리포터 시리즈에 스네이프가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넣었다고 가정해보자. 

 스네이프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과거를 지닌 존재인지, 영화를 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기 때문에 보는 사람들은 그 짧은 장면으로 충분히 감동하고 넘어갈 것이다.

 하지만 신동범에 새로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아직 관객들에게 낯설다. 그들의 배경을 설명해줄 책도 없다.

 내기니는 크레덴스랑 무슨 사이지? 

 레타는 어쩌다 뉴트 형이랑 약혼했지?

 티나는 왜 갑자기 파리에 간 거지?

 등등... 

 영화만으로는 알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고, 영화로 표현된 부분들도 너무 짧고 빈약하다. 그렇기에 전반적인 영화가 산만하다고 느껴진다.

 솔직히 새로 나오는 인물 대부분은 왜 나왔는지 모르겠고, 기존 인물들도 굳이 등장했어야 했나 싶다.

 뉴트와 크레덴스, 덤블도어와 그린델왈드에만 집중해도 괜찮았을텐데 영화를 5부작으로 늘리기 위한 얄팍한 수법인가?

 혹은 조앤 롤링이 복잡한 TV 드라마 플롯에 중독된 걸까?

 


 2. 전작에서 흥한 요소의 고루한 답습


 신동범에 나오는 핵심 요소들은 다음과 같다.


 - 사악하지만 매력적인 악당과 그를 물리치기 위한 선한 강자

 - 괴롭힘 당하는, 알고보니 착한 슬리데린

 - 주인공을 둘러싼 사각관계

 - 자신의 뿌리에 대한 집착

 - 예언에 나오는 강력한 존재

 - 마법으로 매혹시키는 잘못된 사랑

 

 해리포터 팬이라면 어디서 본 내용 아닌가?


 - 사악하지만 매력적인 악당과 그를 물리치기 위한 선한 강자 -> 볼드모트와 덤블도어

 - 괴롭힘 당하는, 알고보니 착한 슬리데린 -> 스네이프

 - 주인공을 둘러싼 사각관계 -> 헤르미온느와 론 위즐리, 라벤더 브라운, 빅터 크롬

 - 자신의 뿌리에 대한 집착 -> 톰 마블로 리들

 - 예언에 나오는 강력한 존재 -> 해리포터

 - 마법으로 매혹시키는 잘못된 사랑 -> 메로프 곤트


 신동사는 다양한 마법 동물들과 그들에게 친화적인 색다른 캐릭터 뉴트, 순수한 노마지 제이콥이 등장하며

 영국과는 다른 미국 마법사 사회를 표현하는 데에 방점을 두어 전작 해리포터 시리즈와 다른 매력을 선사하였다.


 신동범은 반면 위에서 볼 수 있듯 해리포터에서 먹혔던 기존 플롯을 그대로 답습하였다. 

 물론 저 내용들이 각종 판타니 소설이나 영화에 자주 나오는 클리셰이기는 하다.

 하지만 해리포터가 처음 나왔을 때 팬들에게 준 신선한 감동을 생각하면, 이번의 '사골 우려먹기' 행진대회는 그저 눈물만 나올 뿐이다.


 게다가 1번에서도 말했듯이 각 인물들이 저런 행동을 왜 취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으니,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해리포터 시리즈에서 잘 먹혔던 내용을 모양만 가져왔구나, 하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신동범에 대한 해리포터 팬들의 기대가 얼마나 높았는지 아마 제작진도 다 잘 알고 있었겠지.

 내가 보았던 리뷰 대부분이 자신들은 해리포터 원작을 너무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런데도 이렇게 안이하게 플롯을 짰다는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크레덴스는 왜 그렇게 자신의 정체성에 집착하며, 왜 모든 마법사들이 그 예언에 집착하는지,

 퀴니는 왜 마법이라는 무리수를 쓰며까지 제이콥을 영국으로 데려와 강제 결혼하려고 했고,

 레타는 왜 착한데 그렇게 괴롭힘을 당했으며 자신에게 잘해주던 뉴트를 선택하지 않았을까.

 

 아무리 시리즈물이라고 해도, 이건 TV 드라마가 아니다. 한편의 영화 안에서 어느 정도는 납득가는 답변 혹은 암시가 나왔어야 했다.

 



 3. 입문자에게는 너무나 불친절한, 올드팬에게는 너무나 부족한 서사


 해리포터 시리즈가 처음 나온지 벌써 20여년이 지났다. 그만큼 팬들도 나이를 먹었다.

 주변에서 해리포터 원작을 다 읽었다는 사람은 거의 20대 후반 혹은 30대 초반 분들이다.

 해리포터가 롱런하는 시리즈가 되기 위해서는 이제 10대, 20대 신규 팬들까지 사로잡을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걸 무시하듯 수 많은 내용들을 '너도 이미 알고 있지?'하고 넘긴다.

 깨뜨릴 수 없는 맹세, 니콜라스 플라멜, 마법사의 돌, 레스트랭 가문 등등.

 

 전작에서 제이콥은 노마지로서 관객의 입장을 대변해주었고,

 이번에 다시 그를 등장시켰으니 그런 역할이라도 맡겨줬으면 안되는 거였을까? 

 2시간 반 내내 그가 하는 거라고는 퀴니를 애타게 부르는 것밖에 없다. 대체 왜 출연시킨지 모르겠다. 

 단순히 전작에서 그의 캐릭터가 워낙 호평을 받았기에 등장시킨, 혹은 퀴니가 왜 배신하는지 보여주려고 내보낸 소품처럼 느껴졌다.


 신규팬들을 이해시키지 않기로 결정했다면, 최소한 신규팬들이 영화를 보고 호기심이 생겨 위키피디아를 뒤질 정도의 매력을 선사해야 했다.

 하지만 과연 이 영화를 본 사람이 '니콜라스 플라멜이 누구지?'하고 찾아볼까. 


 그래, 신규팬들은 그냥 버렸다고 생각하고 영화가 원작팬들을 타겟팅했다고 가정해보자. 

 많은 원작팬들은 이런 해리포터 관련된 언급을 반가워했을 것이다.  

 '내기니가 사실 여자 인간이다.'라는 부분만 봐도 그렇다. 아직 풀리지 않은 원작의 내용들이 있구나, 앞으로 그런 내용들을 보겠구나 하는 기대를 선사한다.


 그리고 영화는 그런 기대를 안고 간 올드팬들을 비웃듯이 아무 내용도 주지 않는다. 주는 거라고는 크레덴스가 자아 정체성을 찾아 떠나는 게 다이다.

 사실 굳이 내기니가 이 영화에 나왔어야 했나, 아니 수현이 뱀이었어야 했나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는 거라고는 애절한 눈빛으로 몇 마디하는 게 다인데.


 마치 찌라시 기사가 자극적인 제목으로, 혹은 구린 유튜브 채널이 황당한 썸네일로 어그로를 끌듯이 조앤 롤링은 떡밥만 던진다.

 '내기니, 알고 보니 인여캐?! 크레덴스와는 대체 어떤 관계가?!'

 그리고 클릭하면 '내기니는 알고 보니 인간 여자 캐릭터고... 크레덴스와 같이 다니는데 자세한 건 나도 모르겠고요...' 하는 식으로 2시간 반 동안 그 떡밥을 지루하게 설명하고 끝이다.


 '2시간 반짜리 예고편', '팬들에게서 돈을 쥐어짜기 위한 어거지 시리즈'라는 혹평을 들어도 할 말이 없다.






 '총 5편의 시리즈 중 이제 겨우 2편이다, 3~5편을 다 보고나면 모든 퍼즐이 짜맞춰지며 감탄하게 될 것이다'라는 의견들도 보기는 했다.

 그러나 한 편을 제작하는 데에 2년의 시간이 걸린다는 걸 감안하면 앞으로 총 6년을 더 기다려야 하는데,

 영화는 미래 전개되는 내용이 그렇게 기다릴만한 가치가 있는지 보는 이들에게 어필하지 못하고 있다.


 아, 물론 마지막 5분에 너무 말도 안되는 전개가 나오니 그게 어떻게 설명될지 궁금하기는 하다. 

 그 궁금함이 '와, 대체 어떻게 이야기가 풀리지? 너무 기대된다!'가 아니라 '조앤 롤링 네가 어떻게 이 무리수를 푸나 두고 보자'라는 느낌에 가까워 문제다. 


 나는 주변 해리포터들에게 이 영화를 보지 말라고 하고 싶다.

 한번 흥행이 망해봐야 각본가든 감독이든 바뀌지 않을까.

 그리고 당신의 2시간 30분은 소중하다.

 

<자체 제작 짤빵, 오아시스 짤 원본>





 사랑하던 관계를 끝내는 과정에서 마음 아프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은

 경험 상 이별을 고하는 사람은 이별을 통보 받는 사람에 비해 내상이 덜하다.

 이별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이러저러한 경우의 수도 따져보고, 홀로 주변을 정리해두고,

 관계가 끝남으로서 자신의 삶이 어떻게 변할지, 그리고 그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지 막연하게나마 계획을 세워둔 채이니까.

 

 반면 이별의 말을 듣는 사람은, 계속될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해 온 일상이 갑자기 송두리째 흔들리는 충격에 무방비로 노출된다.

 늘상 주고 받던 굿모닝 카톡, 주말마다 이어지는 데이트, 서로를 배려한 휴가 계획, 자기 전에 나누는 매일의 공유.

 오랜 기간 일상의 일부분이 된 상대방이 갑자기 떠나간다는 사실을 한번에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특히나 나같이 눈치가 없는 사람은 더욱 그러했다. 


 돌이켜보면, 둘 사이의 관계에 적신호가 켜졌다는 증거가 한둘이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상대방의 동네나 집에서 만나는 게 당연해지고, 휴가나 기념일 계획을 세울 때에도 시큰둥한 반응이고, 

 주말에 다른 우선 순위가 늘어날 뿐 아니라 어이없는 이유로 약속이 파토나는 일도 생겼었다.

 무엇보다도 심각한 부분은 서로의 미래에 대해 진지한 얘기를 하지 않고, 내가 먼저 얘기를 꺼내더라도 회피한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와중에도 상대의 마음이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없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오래 사귀다보면 오는 자연스러운 권태기에 너무 속상해하지 말자며, 오히려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어쩌면 마음 한 구석으로는 짐작하면서 필사적으로 부정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렇게 마음을 다잡던 중에 뜬금없이 이별하자는 말을 들으니, 그때 받은 정신적인 충격은 여기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다.



 사람들은 이별에 유일한 치료약은 시간 뿐이라고들 말한다. 이 말에 어느 정도는 동의한다. 시간이 흐르면 감정도 기억도 희미해지니까. 

 하지만 슬프게도 우리 대부분은 충분한 애도의 시간을 갖지 못한다. 

 공부니 회사니, 중요한 일상들을 처리하다 보면 자신의 감정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별을 극복하고 이별 이후의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 여러 가지 시도들을 해나갔다.

 이별만으로도 충분히 힘든데, 이별이 내 이후의 삶까지 망가뜨리도록 하고 싶지 않았다.

 이하의 내용은 그 시도들에 대한 리뷰이다.






 <내 나름의 이별 극복 3단계>


 1단계. 연락 끊고 치유하

 2단계. 자존감 회복하기

 3단계. 미뤄뒀던 버킷리스트 지우기




 1단계. 연락 끊고 치유하기는 사실 1~3단계 중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치유' 부분 말고 '연락 끊기' 부분.

 각종 연애 칼럼이나 위키하우를 읽어서 절대 연락하면 안된다는 점, SNS나 카톡을 들락거리면 안된다는 사실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되는, 너무 쉬운 일을 하지 말라니. 

 스마트폰으로 모든 사람들이 언제나 연결된 시대에, 차라리 스마트폰을 부시라고 하는 편이 현실적인 조언이다.


 일단 첫 걸음으로 전남친과 같이 있던 단톡방은 다 나왔다. 자꾸만 프로필 사진을 확인하고, 무슨 말을 하나 지켜보게 되는 자기 자신이 너무 싫었다. 

 SNS나 카톡도 다 차단했다. (물론 한동안 몰래몰래 들여다보기는 했다.) 마음의 정리가 다 된 후에는 사진도 다 지웠다.


 무엇보다 잘한 건, 나같이 헤어진지 얼마 안된 사람들끼리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오픈톡방을 만든 것이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하소연하자니 자꾸 답이 없는 얘기를 하게 되서 상대가 지루해질까봐, 혹은 나를 한심하게 생각할까봐 두려웠다.

 반면 같은 처지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니 나만 이렇게 찌질한 게 아니구나 알게 되어 안심도 되고, 

 방 사람들이 연락하고 싶다는 걸 내가 나서서 말리다 보니, 자존심 강한 성격 상 나도 연락을 참게 되었다. 

 실제로 헤어지고 1주일 후 그동안 받았던 것들을 다 돌려주면서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던 말을 다 담은 편지를 보낸 것 외에 한 번도 연락한 적 없다.


 치유를 위해서는 웹툰 두 개를 보며 많은 위로를 받았다. 

 하나는 네이버 베도에 올라와 있는 '이별에서 이별하는 법'. 이별을 통보 당한 사람의 감정을 세세하게 풀어내는데 표현 하나 하나가 너무 공감되었다.

 



 <출처 : 이별에서 이별하는 법>


 또 다른 웹툰은 저스툰의 '헤어진 다음날 달리기'. 돌배 작가님 작품 특성 상 인물의 감정선이 강하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헤어짐을 계기로 자신을 변화시키려고 마음 먹는 건전한 정신의 주인공에게서 자극받아 나 역시 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멋지게 땀 흘리는 등장인물들을 보니 마라톤 분야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서 '본투런'이나 '마라톤 1년차',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말하고 싶은 것' 등등 마라톤 관련 책들을 읽는 계기가 되기도 했고. 

 아쉽게도 유료 결제가 필요한 웹툰이지만 '샌프란시스코 화랑관'과 같은 웹툰 스타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보길 추천한다.




 2단계. 자존감 회복하기는 다양한 도움을 받아 외모와 심리, 두 가지 방면으로 접근하여 진행했다.


 당시 전남친에게 안 좋은 습관을 많이 옮아(야식 먹기, 음식 먹으며 음료 곁들이기, 먹자마자 눕기 등) 살이 급속도로 찐 나였고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로 꾸미고 데이트 갈 때마다 전남친 반응이 시원치않아, 어느 순간 내 자신을 꾸미는 것에 소홀해졌었다.

 그러니 이별 후 자연히 '내가 예전보다 못생겨져서 헤어지자고 하는 건가'하는 자책에 빠져들었다.

 아마 많은 여자들이 연애가 끝난 후 비슷한 자책을 하겠지.


 외모 부분에서 바로 눈에 보이는 개선을 하고 싶어 선택한 것이 퍼스널 컬러 진단.

 가격은 2시간 5만원 정도로 비쌌지만 그동안 잘못 알고 있던 퍼스널 컬러를 제대로 진단 받고, 어떤 화장이나 스타일이 어울리는지 알고 나니 꾸미는 것이 즐거워졌다.

 게다가 우연인지 운명인지, 마침 전남친이 좋아하던 스타일(차분하고 수수한 스타일)과 나에게 어울리는 스타일(화려하고 튀는 스타일)은 상극이었다. 

 하늘이 나에게 그 사람은 네 짝이 아니라고 알려주는 거 아닌가 생각하니, 미련없이 새로운 스타일을 찾아 떠나갈 수 있었다. 

 스타일이 바뀌니 주변에서 알아차리고 칭찬해주고, 그로 인해 자신감이 상승할 수 있었다. 

 다소 과감하게라도 평소랑 다른 스타일에 도전해보는 것 자체가 기분 전환 효과를 주는 듯하다.


 그리고 위에 서술했듯이 운동에도 관심을 갖게 되어서, 집에서 열심히 홈트도 하고 인스타그램에서 활발히 광고하는 집단 운동 프로그램도 등록했다.

 식단 관리까지 병행하여 3개월 만에 5키로 정도를 뻈고, 지금도 나름 유지어터 생활 중이다. 



 내면 부분은 운동 프로그램과 마찬가지로 인스타 광고로 알게된 '마인딩'이라는 서비스의 힘을 빌렸다.

 1개월 단위로 결제하는 프로그램으로 매일 자기 자신을 위한 소소한 미션을 하면 담당 트레이너가 피드백을 주는 형식인데,

 누군가 내가 하는 활동을 트래킹한다고 하니 꾸준하게 할 수 있었다. 

 특히 좋았던 건 매일 그날 그날의 감정을 솔직하게 적는 미션. 

 내 감정과 행동을 객관화해서 바라보는 과정이, 원리는 잘 모르겠지만 나를 서서히 치유시켜 나갔다.

 그리고 트레이너분이 항상 나에게 긍정적인 피드백을 주시니 힘을 낼 수 있던 것도 있었다.

 내 하루하루를 긍정적으로 봐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게, 나에게도 긍정적인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다만 아쉽게도 2단계 후부터 트레이너분이 그만 두게 되셔서, 3단계를 하려면 다른 분과 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내 이별과 그 후의 히스토리를 모르는 사람에게 내 내밀한 마음을 보여준다는 게 괜히 부담스러워서 나도 그만하게 되었는데, 서비스 자체는 참 만족스러웠다. 

 주변에 심리적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추천해주고 싶은 서비스. 




 3단계. 미뤄뒀던 버킷리스트 지우기는 사실 이별 후에 내 지난 시간이 너무 아깝다는 후회에서 비롯되었다.

 이렇게 지우고 싶은 기억이 될 걸, 뭐하러 그렇게 많은 시간을 그 사람과 보냈을까. 딱히 의미있는 걸 한 것도 아닌데.

 차라리 그렇게 흘러보낸 시간에 외국어나 악기를 배웠다면, 뭔가 결과물이 남고 훨씬 만족스러웠을텐데. 


 그래서 미루었던 버킷리스트들을 하나 하나 이뤄나가기 시작했고, 여전히 이어나가고 있다.

 

  •  일본어 배우기 : 사놓고 안하던 구몬 풀다가, 12월 JLPT 등록해서 준비 중. 요새는 너무 공부할 게 많아 스터디 카페도 끊어놨다.
  •  바디 프로필 사진 찍기 : 운동 모임에 가입해서 열심히 운동하다가 다치는 바람에 일단 홀딩 중.
     대신 해외 여행 가서 여행 스냅 사진을 찍었다. 높은 가격에 망설였지만 결과물을 받아보니 너무 예쁘고 대만족! 내년 안에는 바디 프로필도 꼭 찍고 싶다.
  •  마라톤 풀코스 달리기 : 얼마 전 5K를 두 번 완주했고 (부상 우려 때문에 한 번은 걸었지만) 2월에 날씨 좀 풀리면 제주도에서 하는 대회를 나갈 예정이다.
  •  글쓰기 : '목요일의 글쓰기'를 보고 나도 참가해야지 생각'만' 1년 가까이 했는데, 더는 미루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으로 글쓰기 모임 '199호'를 만들어 운영 중이다. 이제 겨우 3주차지만 벌써 세번째 글을 완성해가는 중이니 나에게는 큰 성과다. 
    또한 몇 년 전 추천받아 사고 읽지는 않은 '아티스트 웨이'를 다 읽고, 책 안에 나오는 워크샵을 7주차까지 따라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따로 글을 쓸 예정인데, 시간이 갈수록 점점 내 안의 크리에이터가 커지는 게 느껴져 신기하다.
  • 소중한 사람들과의 관계 챙기기 : 대학원, 첫 직장, 새 직장 사이를 빠르게 이동하며 나 자신을 챙기기 바빠 내 주변 좋은 사람들을 제대로 챙기지 못했었다. 오랜만에 연락해서 근황을 챙기고, 서로의 고민을 나누는 순간 순간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아직 손대지 못한 버킷리스트 목록들도 많지만, 최우선 순위에 둔 버킷리스트들은 조금씩이나마 이루고 있어 뿌듯하다. 


 
 위에 서술한 1~3단계 외에, 흔히들 추천하듯 다른 사람으로 이전 연애를 잊으려고 시도해본 적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내 경우 이별의 상처가 완전히 치유되지 않은 상태로 누군가를 만나봤자 자꾸 이전 연애가 생각나서 오히려 더 괴로웠다.

 특히 나는 연애를 끝내며 심한 허무감을 느낀 후라, 내 시간과 열정을 써도 아깝지 않은 상대가 아니면 더 이상의 연애를 하고 싶지 않다.
 밴드 퀸의 멤버들이 서로 좋은 자극을 주고 받아 위대한 뮤지션이 되었듯이, 좋은 자극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상대를 만나고 싶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그래도 뭐, 데이트 한두 번으로 나도 누군가에게 매력적인 연애 대상이라는 자각을 일깨우는 것 정도는 자존감 회복 측면에서 나쁘진 않다.




 

 '헤어진 다음날 달리기'의 주인공은 우연히 마주친 전여친에게 '덕분에 더 좋은 자신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고맙다고 인사한다. 

 이별 직후 그 부분을 읽었을 때에는 뭐 이렇게 바보같이 착한 남자가 다 있나 싶었는데, 지나고 나니 이제 그 마음을 알겠다.

 어찌되었든 이별이 아니었으면 난 이 5개월 동안의 변화를 이루어내지 못했겠지. 


 사람들은 변화를 싫어한다. '관성의 법칙'에서 모든 물건이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려 하듯, 어지간한 계기가 있지 않으면 기존의 삶의 방식을 유지하려 한다.

 다이어트나 금연, 자기계발을 결심했다가 이내 흐지부지하게 되는 것도 본인이 원래 살던 삶의 방식을 고수해나가려는 성향 때문이다.

 나 역시 연애를 하며 다이어트를 해야겠다거나,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안해본 게 아니었다. 다만 그 생각이 꾸준한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관성의 법칙'이 그러하듯 사람은 일단 큰 외부의 충격을 받아 움직이기 시작하면,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새로운 방향으로 질주해나가게 된다. 

 정말 간절하게 현재의 자신을 바꾸고 싶다면, 나처럼 한번 이별을 해보는 건 어떨까?


 멀쩡히 사귀던 애인과 헤어지라는 건 아니고, 

 본인에게 해가 되는 관계를 끝낸다든가, 오랫동안 길렀던 머리를 잘라본다거나, 옷장에 간직했지만 잘 입지 않는 옷들을 버린다든가 하는 방식으로

 인생에 색다른 변화를 주면 더 큰 변화로 이어지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아, 물론 제일 좋은 충격은 이별이다. 다들 가급적 헤어지도록.

 솔로는 편하지만 나만 솔로인 건 외로우니까.)


 

 

 만약 오늘 밤 우연히 전남친을 만난다면 난 '헤어진 다음날 달리기'의 주인공처럼 고맙다고 인사할 수 있을까. 

 자신은 없다. 

 하지만 하나는 분명하다. 

 나는 지금 이별 후의 자신이 이별 전의 자신보다 마음에 든다. 

 이별 전과 이별 후의 인생 중, 이별 후의 인생이 더 충만하고 빛났다.


 이 글을 읽는 사람, 아마도 이별한지 얼마 안된 사람이

 시간이 흐른 후 나와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기를.

 같은 이별 동지로서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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