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과 출신 친구들을 만나 과거로 돌아가면 무엇을 하겠느냐 물으면, 하나 같이 같은 답변을 한다.

'전공을 바꿀 거야, 무조건 이과로.'

'코딩 배워서 개발자할 거야. 미래가 불안정한 문과생은 싫어.'

나도 한때 같은 생각으로 그린컴퓨터아트학원을 다니며 (버스 광고 한번 기가 막히게 때리는 그 학원, 맞다) C언어니 유니티니 HTML을 배우겠다 까불던 경험이 있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답변이다.

 

하지만 정말 시간을 과거로 돌린다면 난 전공을 공학이나 이과로 바꿀 수 있을까? 경영학 전공을 하며 꼭 들어야 하는 회계 원리 1, 2와 재무관리만으로도 벅차서 끙끙 앓고, 대학원에서도 통계 때문에 끝끝내 졸업을 못 했는데. 숫자만 보면 눈앞이 캄캄해지고 손발이 덜덜 떨리는 나의 병명은 '숫자 공포증'이다. 초등학교 1학년 수학 시험지에 빨간 비가 내린 걸 보고 '나는 수학을 잘 못해'라는 두려움을 품은 순간부터 그 지병은 평생 나를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그나마 고등학교 때까지는 수능을 위해 억지로 숫자를 붙들고 있었지만, 대학교를 가서는 앞서 말했듯이 피할 수 있으면 최대한 피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다. 그런 내가 지금은 종일 데이터를 보는 디지털 마케터라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이 책의 저자는 원래 직장인을 위한 회계 책을 썼었다. 그런데 한 독자(아마도 나와 같은 숫자 공포증을 가진 분)에게, 숫자만 봐도 정신이 아득해지는데 회계를 어떻게 하냐는 말을 듣고 깨달음을 얻어서 이 책을 내게 되었다고 한다. 첫머리에는 '넘버포비아'들을 위하여 왜 숫자가 중요한지, 왜 도망가지 않고 부딪혀야 하는지 살살 구슬리는 내용으로 책을 시작하고 뒤로 갈수록 가계부나 회계, 데이터 읽기와 같은 심화 내용으로 다가온다. 이런 배려심 있는 구성 덕분에 다른 데이터나 숫자 관련된 책에 비해 무척 편하게 느껴졌다.

 

비록 책에 있는 내용을 모두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편리한 엑셀 함수라든가 숫자 읽는 법에 대한 내용은 업무 수행하며 유용하게 쓰고 있다. 구체적인 사례와 활용법이 담겼다는 점에서 숫자에 대해 1도 모르거나 숫자만 봐도 현기증이 나는 사람들에게 좋은 입문서로 추천한다. 또한 일상생활과 회사생활 각각에서 언제 숫자가 필요한지, 어떻게 하면 현명하게 활용할 수 있는지도 다루고 있기 때문에 학생, 직장인, 주부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책이다. 이 책을 시작으로 나를 포함한 모든 이들의 숫자 울렁증이 완쾌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한창 달리기에 빠졌던 시절, 밤이면 슬쩍 빠져나와 집에서 5분 거리인 한강 나들목으로 향했다. 천 원짜리 몇 장과 핸드폰만 덜렁 챙긴 몸은 평소와 달리 가벼워서, 오늘이야말로 바람처럼 빠르게 달릴 수 있을 거라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실제 내 몸은 경보하는 아줌마보다 천천히 달려도 5분도 안 돼서 지치는 몸 그대로지만.

 

 으리으리한 수상 건물과 공원들이 늘어선 강 건너편과 달리, 한남대교부터 반포대교까지 이어지는 강북 쪽의 풍경은 참 밋밋하다. 변변한 공원도 나무도 없는 좁다란 샛길에 자라다 만 풀과 초목들이 듬성듬성 있을 뿐이다. 구색이라도 갖추려고 둔 듯한 운동 기구는 정비한 지 오래되어 영 색이 좋지 않고, 길을 따라 늘어선 시멘트 기둥에는 누가 그렸는지 모를 그래피티들이 살풍경함을 더한다. 그런데도 몸을 스치는 밤바람은 매력적이고, 강물 위로 반사되는 건물과 다리의 불빛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았다. 바람이 수면을 스치고 지나가면 노랗고 파란 불빛들이 바람의 리듬에 맞추어 흔들리고, 운이 좋아 순풍을 만나면 내 몸이 풍속만큼 빨라진 느낌이 들어 박차는 발에 힘을 더했다. 그렇기에 봄철 미세먼지가 위험하다는 뉴스의 경고에도 나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몇 번이나 한강으로 향했다.

 

멀리서 바라만 보던 남쪽 강변에, 'Wings for Life' 행사에 참여하려고 건너갔던 날. 마침 행사가 밤 8시에나 시작하는지라 그날도 밤바람을 마시며 실컷 달리고 걸을 수 있었다. 아름답게 정비된 길인만큼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내 취향에 맞는 러닝 코스는 아니었지만, 그 와중에 바람에 맞추어 좌우로 흔들리는 나무들을 보니 그 길에서 일상적으로 달리는 러너들이 부러웠다. 온 몸으로 나부끼는 나무들을 보면 마치 그들도 나처럼 바람을 즐기는 것 같아 흥이 돋았다. 달리기를 즐기기 위해 필요한 준비물은 내 몸과 약간의 바람뿐이면 충분하지만, 함께 그 바람을 음미할 수 있는 친구들이 있다니. 

 

 밖으로 한 걸음만 나가면 습기로 숨이 턱턱 막히는 요즘도, 상쾌한 밤바람에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를 생각하면 다시 달리고 싶어져 발이 근질거린다. 당분간은 그 행복을 느끼지 못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흘러가는 잠깐의 행복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실물은 훨씬 아름다웠는데, 사진이란 게 원래 이렇지 뭐

글감 '밤바람에 대해 써라'

출처 : https://lakinan.tistory.com/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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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17일은 고백데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빼빼로데이처럼 모양새로 연상되는 것도 아니요, 발렌타인데이처럼 유래가 있는 것도 아니다. 갸우뚱하며 지식인을 찾아보니 이 날 고백하면 크리스마스날 100일 기념일을 맞이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누가 이런 생각을 해낸 건지 참, 헛웃음이 나온다.

 

 누군가 고백은 하고 싶은데 핑계 거리를 찾느라 만든 날이라면 귀엽고 훈훈하겠지만, 크리스마스를 둘러싼 우리네 문화를 생각하면 크리스마스에 혼자 있기 죽어도 싫다는 뿌리 깊은 공포가 느껴지는 기념일이다. 몇 년 전 크리스마스 시즌, 솔로대첩이라는 미명하에 짝을 찾기 위해 거리를 나선 청춘들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저걸 누가 올까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았는데 막상 시작하니 참가자(물론 거의 남자들이었지만)들로 공원이 터질 지경이었고, 서울뿐 아니라 전국 주요 도시에서도 열풍이 불었었다. 크리스마스 무렵 인터넷 유머 게시판을 둘러보면 크리스마스에 애인 없이 혼자 지내면 루저라느니, 올해 산타에게 비는 소원은 애인이라느니 하는 자조적인 유머글도 많다. 크리스마스 즈음에 자살률이 높아진다는 통계자료를 굳이 들고 오지 않더라도, 크리스마스는 분위기상 홀로 보내면 안될 거 같은 날이다.

 

 돌이켜보니 살면서 30여 년간 남자친구와 보냈던 크리스마스가 거의 없다. 어릴 때에는 솔로인 친구들과 파티를 하거나 어딘가 나가려고 노력이라도 했는데 언젠가부터는 그것도 귀찮아서 그냥 집에서 홀로 나만의 시간을 보낸다. 길거리는 춥고 어딜 가도 사람들로 미어터지고, 꽁냥거리는 커플들 보기도 싫고. 캐롤을 틀어놓고 나름의 소소한 크리스마스 데코레이션을 하고, 드라마를 시즌 1부터 정주행 한다거나 추리 소설을 잔뜩 쌓아놓고 읽거나 하며 잘도 혼자 할 것을 찾아 해낸다.

 

 다만 그러면서도 마음 한 켠은 내가 어딘가 잘못된 건 아닐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이 느껴지기도 한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이 축복받은 날을 즐기는 듯하고, 제 짝을 만나 정답게 지내는데 그런 기본적인 미션을 깨지 못한 나는 도태된 유전자가 아닐까 불안하다. 다들 즐겁고 행복한 중에 나만 고립되어 고독감을 곱씹는 건 아닐지 주변을 둘러보다가 자기도 혼자 크리스마스를 보낸다는 동지를 만나면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그래서 나에게 크리스마스는 (개념적으로는) 아름다우면서도 (현실적으로는) 어둡게 느껴지는 날이다. 차라리 해가 바뀌고 새로운 목표와 다짐이 생기는 12 31일이 훨씬 기대된다.

 

 지금의 연애 페이스 대로라면 이미 올해 크리스마스에도 애인과 함께하기는 글렀다. 썸은 거녕 관심남조차도 생기지 않는 건어물스러운 매일 매일, 일과 자기계발, 취미 생활로 하루 하루가 정신 없고 피곤하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내가 아니다. 매년 크리스마스 봉사활동을 하자고 마음 먹다가도 마음에 드는 봉사처를 찾지 못하고 어영부영해질 때가 많았는데, 올해는 반드시 이 12월의 가장 어두운 날을 이타심으로 밝게 빛나게 하고 싶다. 사랑을 받는 건 내 의지대로 되지 않지만, 누군가에게 나눠주는 건 내 마음만 먹으면 되니 얼마나 편한가.

 

 

 

글감 '12월의 어느 어두운 날'

출처 : https://lakinan.tistory.com/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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